나는 한 번도 간호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줄 광고, 친구가 쥐여준 입학 지원서, 몰래 다녀온 시험장. 그 모든 우연이 내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해 겨울, 용산의 철도간호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간호학교에서의 시간은 따뜻했다. 나는 호기심과 새로움으로 기대에 가득 차서 첫 학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만남은 너무 새로웠고, 기숙사 생활은 동지 의식으로 가득한 학창 시절이었다. 철도 사고 환자들의 비참한 모습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무게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를 떠났지만, 우리는 간호원이라는 이름을 배웠다. 손끝의 기술이 아니라, 눈빛의 온도로 환자의 고통을 읽어내는 일. 그것이 간호원의 시작이었다.
병동에서 보낸 날들이 쌓이고, 어느새 내 앞엔 세 개의 여권이 놓였다. 미국, 캐나다, 독일.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나 또한 타국의 병원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땅에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던 순간에도 나는 환자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간호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서울 용산에 있던 철도간호학교에 입학하면서 간호원의 길을 시작했다. 집을 떠나 동기들과 어울리며 공부하고 하루 3~4시간 수면, 간호복을 입고 행군하던 시절을 지나, 병동과 수술실에서 수많은 생과 사를 마주하며 간호의 본질을 배웠다.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원(당시 강호사 호칭)으로 근무하며, 타국의 병원에서도 환자 곁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이민자로서의 외로움 속에서도 간호원의 정체성은 그녀를 붙들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청춘을 보냈던 철도간호학교가 역사박물관이 된 것을 계기로, 지난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단지 개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이름 없이 헌신했던 수많은 간호원들, 그리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기억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이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간호원이었고, 그 이름으로 살아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간호원이다.”
현재는 두 자녀와 네 명의 손자녀를 두고 있으며 후배 간호원들과의 다양한 만남을 통해 자기 경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